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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4일
(리마는 매우 크다. 서울과 비교해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러 District들로 나뉘어지는 메갈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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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비행기에서 에어컨을 너무 많이 쐬었기 때문이었을까. 더 자고 싶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9시 40분. 옆 침대 사람은 새벽 5시까지 들어오지 않더니만 웃통을 깐 채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아 남자분이자너...여기 혼성돔이었구나... 예약을 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때였으니 기억 따위 날 리가 없다. 룸메분의 왼쪽 어깨에는 내 주먹만한 문신이 있었고 덩치의 건장함은 토르의 그것과 같았다. 저기,, 혹시 어제 불타는 론리플래닛식 나이트라이프를 보내고 오신 건가여...아무튼 나는 왠지 쪼그루루룩 쪼그라들어 침낭 안에서 더 잘지 아침이나 먹으러 갈지 인생의 고민을 시작하였다. 결론은 늘 그렇듯 얼른 나가서 호스텔비 뽕이나 뽑자! 였음.
플라잉 독 호스텔에서는 왜인지 신기한 방식으로 아침을 제공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직원에게 식권을 받아서 (도장이 콩 찍힌 작은 표쪼가리) 옆 건물의 레스토랑에서 아침으로 바꿔 먹는 방식. 머뭇머뭇거리며 종이 쪼가리를 내밀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의 현란한 디저트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카페라떼 한 잔이 놓였고
친근한 비쥬얼의 과일 파르페와 요거트, 그리고 쥬스까지
아닛 이런 훌륭한 구성이라니? 뭘 이렇게 많이 주는 것? ㅋㅋㅋㅋㅋㅋㅋ 쉴새없는 유지방과 섬유질의 폭격을 받고 있자니 아침부터 장운동이 활발해 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장에 좋은 친구(...) 파파야를 떠먹으며 창밖으로 바라보는 리마는 잔뜩 흐려 있었다. 여기는 맑은 날을 보기가 더 힘들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새들은 페루에 와서 죽는다고, 이 우중충한 하늘 아래 있자니 또 어디선가 주워 들은 로맹 가리의 책 제목도 떠오르고. 막상 저 책을 읽은 건 이 때로부터 4년여가 지난 때였지만 말이다,,,아무튼 다 먹자마자 숙소로 돌아와 간밤 나를 반겨주었던 고양이를 찾아 헤매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곳 플라잉 독 날으는 개 호스텔은 당시 꽃보다 청춘에 나왔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부쩍 많아졌다고 들었지만, 그분들 역시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냥 한인민박이나 갈 걸 그랬나....카리브해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인 알레르기가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지만 막상 멕시코 아닌 타지에 혼자 떨어지니 심심하고 외로웠던 5년 전의 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마ㅠㅠㅠㅠㅠ리마 무섭단 말이에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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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날 하루도 시작되어 버렸으므로,, 씻고 나와 무작정 미라플로레스 지도 한 장을 얻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길 한복판에 내던져진 나는 일단 침착하게를 되뇌이며 (....? 어제는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며)
메트로버스 역으로 향했다. 첫날에는 역시 구시가지를 죠져야지 하며.
다행히 막상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깔끔하고 안전해 보였던 것
급속도로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사진은 없지만 케네디 공원을 지나다 보니 비둘기마냥 널브러진 길고양이들도 있었고. 벤치에 앉아 이것들을 쫓아다니며 마냥 두세시간을 소모하고 싶었지만 오전에 워낙 늦게 일어난 탓에 시간은 어느덧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자 귤아
전날 칸쿤 공항에서 바꿔 놓은 달러들도 처리해야 했기에, 길거리의 파란 조끼 환전상 분들께 환전도 했다. 당시로는 2.9였는데 요즘은 어떨까
암튼 100달러 대신 페루 솔로 된 돈뭉치를 들고 총총 버스를 타러 간다. 메트로버스 정류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표를 사는 기계가 눈에 띄었다. 오늘 하루 동안 구시가지를 버스로 왕복할 계획이었으므로 (계획은 계획일 뿐) 카드를 사려고 빳빳한 10솔짜리 지폐를 기계에 들이밀었...지만. 무심한 기계는 토하고 또 토할 뿐이었다. 옆의 관리인 아주머니께서 '새 지폐는 인식을 못할 거야...'라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실 뿐. 아니 뭐요? 좋은 걸 줘도 먹지를 못한다고? ㅠㅠㅠㅠㅠ 너란 기계...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이걸 구겨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뒤의 아저씨께서 구깃한 지폐를 내밀었고 나는 뜻밖의 지폐물물교환으로 무사히 카드를 사서 개찰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작부터 어드벤처인 리마 너란 도시
미래도시같고 신기한 메트로버스 정류장 히힛
메트로버스 자체는 멕시코시티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막상 거기서는 한 번도 타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리마에서도 버스는 이때 한 번만 탔을 뿐이고....남은 잔액도 얼마 없던 이 카드는 아마 이후 여행하다 만난 한국분께 증정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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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기다리자 등굣길 5511마냥 살벌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후우 저걸 타야 한다고요....
누군가를 밀어넣으며 버스에 타본 것이 당시로써는 참 오랜만이었다. 잊고 살았다 이 치열함...그리운 께레따로의 Red Q 버스...하며 정신을 놓고 문손잡이에 매달려 있었다. 10분쯤 달렸을까. 내가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뭐냐 낰ㅋㅋㅋㅋㅋ 그리하여 옆의 아주머니께 Centro Historico가 어디냐고 여쭤보자 본인도 거기에 내린다고 대답하셔서 살짝 안도하였고. 중학교 과학선생님이시라던 아주머니와의 대화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주머니 : 아니 설마 여기 혼자 온 거여?
나 : ㄴ..ㅔ..
아주머니 : (경악하시며) 무어어??? 안돼!! 어떻게 구시가지를 외국인 여자애 혼자 다닌다는 말이야!
나 : 저 멕시코에서도 계속 혼자 여행 다ㄴ.... (아주머니의 포스에 쫄아서 끝까지 말을 못 잇고 있다)
아주머니 : (절레절레...)
이 때 알았지만 리마의 구시가지는 주말이면 전부 문을 닫아 슬럼화가 된다고 한다. 아니 뭐 그래두 세계 어디를 가나 구시가지가 신시가지보다는 위험하고 하니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여? 오히려 가게 문 닫으면 사람들도 없고 (??) 안전하지 않냐며....그렇게 아주머니와 나는 구시가지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다. 하지만 Zona Turistica의 초입부터 문 연 가게 하나 없고, 거무튀튀한 얼룩과 그래피티로 가득한 가게 셔터들이 음산하게 나를 반겼을 뿐. 이래서 현지인 말을 들어야 하는 거였나. 아주머니는 그 광경을 보시더니 또 다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당신 딸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셨다. 내용은 대략 '나 버스에서 아시아 여자애 하나를 주웠는데 얘가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구시가지까지 버스 타고 와버린 거야? 얘 어쩌지?? 집에 데려가서 밥 좀 먹일테니 오늘 하루종일 너가 좀 보살펴줄래??' 였다. 그렇게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주체적인 여행자였던 나는 갑작스럽게 국제미아(.....)가 되어 아주머니의 집에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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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의 집에 가는 길은 상상보다 더욱 험난하였다.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며 나는 리마의 중심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물론 마지막 버스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나를 보는 시선도 ◎_◎?? 얘가 왜 여기에??? 였음) 생각해 보니 나 지금 대책없이 혼자 버스 타고 온 것도 모자라서 대책없이 현지인 집에 따라가고 있잖아???? 나니?? 이래도 되는 걸까....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라는 의문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지만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아주머니의 믿음직한 직업과 깔끔한 정장 차림에 신뢰를 회복. 이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남미의 치안 상태가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드디어 내린 동네에는 휑한 흙먼지 길에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덩치 큰 떠돌이 개들. 이게 바로 어제 오늘 미라플로레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리마의 진짜 얼굴이겠거니 싶었다. 계단을 조금 올라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그 위로도 수많은 집들이 나무 하나 없이 붉고 휑한 돌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튼 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확.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도 따스하게 나를 반겨 주었다.
두리번거리며 앉아 있으니 곧바로 음식들을 내어 주셨다.
큰딸 Koti, 작은딸 Lucy, 막내아들 Juang 그리고 성함을 까먹은 아부지까지. 단란한 5인 가족이 모두 한 집에 때마침 계셨던 건 아마 일요일이었어서 그랬겠지..? 어머니 아버지 두분 다 교육자이시고 자녀들은 공대생인, 말도 안 되게 지적인 집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하필 만난 현지인이 이런 분들이었다는 건 정말 귀한 우연이고 행운이었네.
아무튼 덕분에 식사 내내 그들은 나에게 페루에 대해 다방면으로 소개해 주며 특히 페루의 지형과 기후 ㅡ 딸이 지리공학 전공 ㅡ 그리고 역사 ㅡ 아부지가 역사 센세 ㅡ 에 대해 폭풍 토론을 하였다. 아들은 동아시아에 또 관심이 많고,,안 되는 말로 설명해 주려다가 두뇌를 풀가동해서 지쳐버려따..
페루의 가정식을 맛본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데리고 오는 내내 '페루 바깥 음식은 맛이 없다'고 하셨는데 착한 집밥 부심이셨던 것!
후식으로는 신기한 과일을 내어 주셨다
여행자 본능을 참지 못하고 사진을 찍으니 아부지께서 더 신나셔서 자꾸만 새로운 것들도 가져오라곸ㅋㅋㅋㅋ기왕이면 예쁜 접시에 담아오라고 하셔서 어찌나 감사했는지...
안을 보면 이렇게 노란 방울토마토처럼 생겼고 식감도 방울토마토 그 자체. 하지만 맛은 달달한 딸기 맛이었다
내가 지금 뭘 먹고 있는지 모르겠는 맛이지만 나름 입가심으로 딱
색깔별로 담겨 온 과일들
기념사진 촬영까지 마쳤다. 내 발 색깔이 매우 충격적이네....이게 바로 중남미 생활 5개월차의 바이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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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했던 점심식사를 마치고 큰딸 코티와 아들 후앙이 내 구시가지 관람에 동반해 주기로 했다. 든든한 기분으로 시내로 돌아갔다. 반대로 내가 길 한복판에서 외지인을 만났더라도 이렇게 따스하게 대접하고 자기 식구처럼 걱정해 줄 수 있었을까....흑흑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감사한 기억. 다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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