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0 : [Punta Arenas] 세상의 끝 이정표
2015년 1월 21일
글로리아 아주머니네에서 먹는 여행 50일째의 아침. 뜨끈한 빵과 치즈 두 조각, 그리고 핫초코와 따끈한 우유를 내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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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칠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교환학생 학기 종강 후 여행을 가야지! 하고 결심하고 계획표를 짰을 때까지만 해도 딱히 '50일 동안 여행해야지' 라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딱 50일을 맞춰 여행하고 멕시코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떠나 향한 곳은,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푼타 아레나스. 처음 푸에르토 몬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을 때도 '참 낯선 이름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 도시로 돌아간다.
여행일수가 길어질수록 어째 무거워지기만 하는 (나 되게 열심히 옷가지 버리고 다녔는데 기념품들 때문인가) 캐리어를 끌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 무자비한 언덕길을 올랐다. 덕분에 나탈레스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좁아터진 터미널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땀에 쩔어버린 니트를 벗어 던지고, 50일 동안 입느라 어느새 조금은 누렇게 변해버린 (ㅎ) 흰색 나시를 주워 입는 것이었다.
푼타 아레나스까지 가는 길
파타고니아는 마지막까지 내게 아름다운 날씨만 선보여 줄 모양이다. 파란 하늘 아래 탁 트인 평원 위로 바람이 불자 갖가지 색의 꽃들이 마구 휘날렸다. 이 정도 바람은 익숙하다는 듯이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나뭇가지들도. 멍하니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파란 푼타 아레나스의 바다가 짜잔
도착한 곳은 익숙한 Bus Sur 터미널이었다.
그때는 매서운 비바람에 (아 생각해보니 날씨가 안 좋았던 파타고니아에서의 하루도 있긴 있었구나) 온몸이 달달 떨릴 정도로 추웠고, 밖으로 나가 보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서 터미널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던지라. 처음 오는 도시처럼 느끼며 아르마스 광장을 향해 가 본다. 그렇게 며칠만에 돌아온 푼타 아레나스는 분명 별 거 없는 도시라고 들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역시 날씨운이 여행의 전부인 것이여 💁
아르마스 광장 가는 길. 와이파이 쓸 카페나, B오빠가 알려준 막달리나 섬 펭귄 투어 신청하는 여행사나, 은행이나 아무튼 뭐든 있겠지
중간에 길을 물어봤던 칠레 아주머니가 (파란 마스카라를 바르고 계셔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어찌나 친절하셨던지. 짧은 대화만으로 영혼의 배터리가 방전 -> 풀충된 기분이었다.
세상의 끝에도 식민지풍 건물은 있구나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건 여행사! 오늘 저녁 출발하는 펭귄 크루즈는 다행히 자리가 넉넉히 남아 있었다. 크루즈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웬만하면 만석인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순식간에 6만원을 쓰고 초록색 티켓 한 장을 받았다. 이렇게 쉬운 일인데 (?!) 라 세레나에서도 훔볼트 펭귄 보러 갈 걸 그랬나. 살면서 언제 또 야생 펭귄을 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뭐 지난 일은 후회 말자 🥺
상냥했던 여행사 직원 언니는 사무실에 내 캐리어와 배낭을 맡기는 것까지 허락해 주었다. 가벼워진 육신으로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바다를 보러 가보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진 잘 모르겠었고, 그저 구글맵 켜 놓고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도착한 푼타 아레나스의 바다
왠지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파아란 색깔의 바위에 긴 부두가 있었고, 그 위에는 빼곡하게 물새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 풍경일까. 남미 여행을 하며 매분 매초 느꼈던 그 감정을 마지막까지 느끼며 천천히 산책을 했다.
여느 바닷가 공업도시의 모습
너무도 펭귄같이 생겨서 종류가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친히 써줘서 좋았다
사실은 가마우지였구나 이녀석들;ㅅ;
현지인과 배낭여행객들이 뒤섞여 있었던 바닷가
난생 처음 보는 꽃이 또 이렇게 길거리에 자연스럽게 피어 있으니 당황스럽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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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만나기로 했던 B오빠와 연락을 해야 했지만, 당시 유심카드 없이 와이파이 거지로 지내던 김귤희는 딱히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하여 번듯해 보이는 카페에 무심코 들어가 콜라와 치즈케잌을 주문하였으나... 와이파이가 없는 곳이라고 한다.
물어보고 시켰으면 좋았을걸 나는 무어가 그리 급했니
아무튼 치즈케잌은 맛있었고, 토레스 델 파이네 이후로 중독되어 버린 콜라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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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는 것도 일이지만 이 오빠를 어디서 만나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일단 아르마스 광장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광장이 괜히 광장이 아니고,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간 오빠가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아마 조선시대에 사람을 만났다면 이렇게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으로 벤치에 죽치고 앉아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뒤적이고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저멀리 누군가 뛰어오는 걸 보니 어김없는 B오빠였닼ㅋㅋㅋㅋ
광장에 나와서 일기나 쓰고 있다 보면 내가 지나가지 않을까 했다고.. (푼타 아레나스가 좁은 동네라 참으로 다행)
아르마스 광장에는 마젤란 동상이 있다. 발을 만지면 뭔가에 좋다는 도시전설이 있는지? 다들 발만 만져서 발 부분이 반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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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나 그렇지만, 푼타 아레나스의 아르마스 광장도 활기찬 곳이었다. 주변에 그득한 기념품 상점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웠고, 대부분의 기념품 가게에서 양과 펭귄 인형을 팔고 있었다. 양은 왜지?ㅅ? 아무튼 여기서 펭귄 인형 2개를 샀다. 남미에서 산 마지막 기념품이었네.
시간은 잘 흘러 어느덧 오후 3시 반이었고, 항구까지 넉넉히 가려면 4시에는 아르마스 광장을 떠나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전에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언덕 위의 화살표들' 이었다. 쓰고 보니 이게 뭐 하는 곳인가 싶기도 하지만 푼타 아레나스의 몇 안 되는 랜드마크이기 때문에. 전날 이미 봤다는 B오빠가 알려준 길로 달려가 본다. 4일간의 강행군으로 누더기가 된 줄 알았던 새끼발가락도 이런 때에는 멀쩡하네
언덕의 이름은 Cerro de la Cruz
올라가는 데에 10분이 꼬박 걸렸다. 자 이제 10분 보고, 10분 동안 내려가면 되겠다 😳
와 이렇게 보니 푼타 아레나스도 참 정신없는 동네이네. 온갖 양식의 집들이 조화 아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성 나오는 풍경
이 언덕이 유명한 건 이 화살표 때문이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세계 각지의 도시들까지, 어느 방향으로 몇 km가 떨어져 있는지를 표시해 놓은 화살표들. 오사카, 세비야, 카이로, 서울까지. '칠레 울티마 에스페란사 주(州) 푼타 아레나스의 Cerro de la Cruz 언덕'이라는 위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장소들을, 화살표들은 무심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평창까지 가려면 이렇게나 머나멀구나
세상에 끝에서 부는 바람 (이라고 믿고 싶었던 바람) 을 한동안 맞으며 푼타 아레나스의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우수아이아로 흔히 알려져 있는 세상의 끝이지만, 이곳도 그 못지 않은 남미 대륙의 남쪽 끝이기에.. 어쨌든 끝에서 여행을 끝내게 되었다. 이제는 더 내려갈 곳도 남극 말고는 없으니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야지 😭
막달레나섬으로 가는 여객선을 놓칠까 황급히 아르마스 광장으로 뛰쳐 내려오는 길
그 와중에 이런 걸 찍을 정신은 있다
오늘도 낯선 파타고니아의 성당들
여행사에서 부리나케 짐을 찾아 항구로 간다. 남미여행 마지막 포스팅은 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