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gabond/2015 Chile

D+44 : [Puerto Natales]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입성

만만다린 2019. 7. 22. 00:21



2015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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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가 될 것을 예상했다. 오늘은 푸에르토 몬트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푼타 아레나스로 간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날이다. 순전히 이동을 위한 하루


간밤 쿤스트만 맥주와 함께 아늑한 밤을 보냈던 1인실을 떠날 시간이다. 커피 한 잔 사먹지 못하고 푸에르토 몬트를 떠나게 되네.

아쉬운 마음이 큰 와중에 숙소 아침이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다. 일반적인 호스텔 아침이 아닌 직접 해 주시는 아침이어서 더 그랬을까. 폰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그랬네. 아무튼 허겁지겁 먹고, 친절한 주인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는 생업마냥 자연스럽고 편하게 짐을 이고 끌며 버스 터미널로 갔다. 전날 예약해 놓은 공항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는 걸까나 아마도 수도인 산티아고로 가겠지?



공항은 시내와 꽤나 거리가 있었다


예상대로 무척 작고 아담한 규모의 국내선 공항. 인터넷 어딘가에서 푸에르토 몬트 공항의 VIP 대기실 와이파이를 발견해서 개꿀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새 비밀번호가 바뀌었는지 휴대폰 액정에는 무심하게도 '연결할 수 없음' 표시가 뜰 뿐이었다. 그래도 늘 그렇듯 시간은 잘 가기 마련이다. 칠레의 저가항공인 Sky Airline을 타고, 칠레의 절반을 훌쩍 건너뛰어 아래로 내려갔다. 몬트 아래의 칠로에 섬, 북부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마을들과 호수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게 아쉽지만 언젠가 다시 칠레에 돌아올 수 있기만을 바래야지.



그렇게 드디어 이곳까지 왔다


비행기에서 좀처럼 안 자는 사람이지만 이맘때의 김귤희는 뭐만 탔다 하면 아가처럼 잠들곤 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몽롱한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푼타 아레나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축축해진 캐리어가 컨베이어 벨트를 한바퀴 빙 돌아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왔다. 손잡이에 묶여 있던 젖은 손수건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훨씬 더 시리게 느껴졌다. 우수아이아만큼은 유명하지 않지만 이곳도 나름 세상의 끝으로 불리는 곳. 택시를 타고 시내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너무도 차가워 보였다. 여행 44일차가 되었고, 열심히 남쪽으로 내려온 보람이 있는지 이젠 남태평양을 지나 남극해에 더 가까운 바다를 보고 있다. 늘 이런 것에 의미를 두는 인간인만큼 또 설레기 시작.



Sur bus라는 이름의, 파타고니아 남부에서는 1등 버스인 회사에 무사히 도착. 이곳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왕복표를 사야 했다. 


작은 어촌 마을인 동시에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인 푸에르토 나탈레스. 그곳에서 며칠간 머물며 3박 4일 간의 W트래킹을 하고, 다시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와 멕시코시티행 비행기를 타면 내 한 달 간의 남미 여행이 끝난다. 심-란한 상태로 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금방 떠나는 버스들은 전부 매진되고 없었다. 역시 여기 오는 사람들의 목적도 다 똑같은 게지


그리하여 내가 타게 될 버스는 오후 3시 15분 차. 아직 시간은 1시밖에 되지 않았고 배도 고팠지만 도저히 이 캐리어를 끌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날 낯선 도시에서 식당을 찾아 방황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날 슈퍼에서 샀던 오렌지 쥬스를 까먹어 봤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일 뿐이었고... 결국 아껴뒀던 신라면을 깠다. 마지막 딱 하나 남은 라면이었는데 이걸 생으로 버스 터미널에 주저앉아 먹게 될 줄이야 내 인생



눈물의 생라면

입안이 얼얼해져 마찬가지로 아껴두었던 생수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한참을 기다리고... 다시 한 입 주워먹고... 그러며 이때 봤던 영화가 <인사이드 르윈> 이었다. 시니컬한 기분으로 버스를 탈 수 있었음.



보다시피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푼타 아레나스보다 북쪽에 있다






창밖으로는 낯선 꽃들, 그리고 거센 바람 때문에 기형적으로 휘어져 자란 나무들 뿐이었다.

내가 예사로운 지역에 와 있는 건 아니구나. 그래 여기는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였지. 버스 속도 때문인지 밖이 그만큼 추워서인지 자꾸만 냉기가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겉옷이라도 더 꺼내서 덮고 있을걸... 하며 후회의 말들을 중얼거린 지 3시간이 지나서야 버스는 나탈레스 시내로 들어섰다.



은근히 신기한 지형이었던 푸에르토 나탈레스



같은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던 한국분들과 오손도손 택시를 타고 중앙 광장으로 간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첫인상은 갖가지 색의 몸통과 지붕, 동화 속에서 나올 것 같은 깜찍한 색조합의 집들. 흐린 하늘과 흩날리는 빗방울 아래에서도 그 알록달록함은 쉬이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의 내 첫 숙소는 멕시코에서부터 예약해 놓았던 Lili Patagonico's


숙소로 가는 내내 입고 있던 알파카 가디건 ~쿠스코에서 득템~ 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점차 멀리서부터 하늘이 개어 오는 게 보였다. 오늘 시내 구경은 좀 하다 잘 수 있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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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숙소는 론리플래닛에서도 추천하고 있는 곳.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시설이었다. 일단 이층 침대 없는 방이었어서 마냥 행복했다. 하루 종일 이동에 이동을 거치다가 모처럼 잡은 와이파이 덕분에 한참 동안 휴대폰을 쪼물락거리다가, 어느 블로그에서 El Bote라는 식당을 발견하고는 '연어 스테이크나 먹으러 가 볼까' 하며 조금 더 옷을 두텁게 껴 입고 거리로 나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여기는 내 나탈레스 단골집... 다시 돌아와도 여기만 갈 거야...



남은 힘 모두 모아 식전빵 쪼개버리기



창밖의 풍경



8천원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EL BOTE의 연어 스테이크. 이때가 2015년이었는데 지금은 가격이 어떠려나



배 뚠뚠하게 먹고 거리로 나와 보니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여전히 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억지로 동네 한 바퀴 시작




모처럼 강쥐 한 마리 몰고 다녔다. 얌전히 20분 동안이나 곁을 지켜주면서 따라와 줘서 고마웠다 댕댕아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카테드랄..?


우유니에서부터 느꼈던 거지만 특히 칠레는 뭐랄까. 멕시코와 페루에서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스페인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이 아닌, 독특한 성당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긴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대리석으로 성당을 짓진 못 했겠지. 아쉽게도 문은 꽁꽁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한편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초초초 성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마을은 한적했다.

여기는 리얼로 고생을 무릅쓰고 오는 트래커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물론 그런 사람들은 나처럼 한량스럽게 거리를 배회하지 않고 마트에서 식량을 비축하거나 렌탈샵에서 장비를 점검하겠지,, 그렇고 말고,,



나탈레스의 귀여운 쓰레기통


무튼 개미새기 한 마리 없는 거리가 문득 심심해져 근처의 마트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여기는 unimarc가 대세인 모양



내일 모레 출발이니까, 4일치 식량은 내일 오후에 장만해 보기로 한다

뭘 사야 가성비... 아니 무게비(?) 좋게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쉽게 올 수 없는 곳까지 왔다는 기분 탓일까? 흔한 구름과 석양도 놀라워 보였던 건



그렇게 숙소 바로 앞까지 돌아왔다


이런 휴게소 감성 너무 좋네. 아무튼 여기도 성수기에만 관광객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비수기에는 쉬겠지. 나탈레스 전체가 아마 겨울에 오면 유령마을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자체로 나름대로 활기찬 곳이라는 건, 날씨가 조금 더 화창했던 다음날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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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들어서며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후 9시. 발파라이소에서의 오후 9시, 푸콘의 오후 9시, 푸에르토 몬트의 오후 9시보다는 조금 더 높게 떠 있었던 나탈레스의 해. 칠레의 최남단에 가까워진 이 곳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는 아직까지 해가 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엎드려 사진 정리를 하고, 내일 뭘 빌리고 뭘 사야 하는지 목록을 만들고, 나보다 먼저 트래킹을 다녀온 한국 분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실 때까지도. 그리고 다시 손목시계를 보고 아니 뭘 했다고 열한시지? 오늘 하루는 왜 이렇게 빠른 걸까.. 하고 생각할 때까지도 숙소 창밖은 그저 환했다.




놀랍게도 밤 열한시에 찍은 사진


아무튼 내일은 한가하면서도 한가하지 않은 하루가 될 테니 어서 잠을 자자. 본격적인 트래킹 준비는 투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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