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2 : [Pucon] 수국은 푸콘푸콘해
2015년 1월 13일
오늘도 푸콘은 평화롭습니다
여행 42일째 아침이었다. 푸콘에서 보내는 두 번째 날. 그저 동네 여기저기를 걸어다니고, 인터넷에서 본 맛집에 들러 끼니를 해결하고,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서 돌아다니다가 저녁에는 호수 구경이나 해야지. 하고 결심했고 실제로 그것밖에 하지 않았던 날.
호스텔에서 아침을 주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2층 침대가 아닌, 꽤 넓은 싱글 침대에서 푹 잤다. 천천히 씻고 11시가 넘어서야 밖으로 나와보니 오늘도 파란 하늘
조용조용 평화로운 푸콘의 오전
달리 할 것도 없었으므로 여기저길 좀 더 걸어다니다가, 어느 네이버 블로그에서 본 식당에 들러 보기로 했다
간판도 뭣도 없는 전형적인 현지인들을 위한 식당이었지만, 조용히 쪽문을 열고 안을 기웃거리면 이내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와 앉으라고 손짓을 해 주시는 그런 곳이었다. 오늘의 메뉴를 주문하고 식전빵부터 얌얌
따끈하고 야채도 골고루 들어 있던 Cazuela와
싱싱한 샐러드가 나왔다
까수엘라 국물 간이 생각보다 쎄서 많이 먹진 못했지만, 남미에서 따뜻한 국물이 얼마나 아쉬운지 잘 알기 때문에 기쁜 맘으로 후루룩 떠 마시다 보면 타지에서 혼자 이것 저것 보겠다고 낑낑대며 쌓인 외로움이 싹 가시곤 한다.
어딜 가나 담벽 위로 수국이 쏟아지는 계절
조용히 남의 집 창밖 구경
이름 모를 꽃인데 봉우리가 너무 탐스러워서 한참 구경
칠레의 여름에 푸콘에 오길 잘 했지
그렇게 동네를 두어 바퀴 돌며 꽃 사진만 잔뜩 찍어버리기... 나이가 드는 걸까
그건 그렇고 오늘은 날씨가 흐렸다.
전날 충동적으로 화산 트래킹을 갔더라도 아마 날이 좋지 않아서 투어가 취소되었을 것 같다. 어차피 화산은 못 오를 운명이었구나
파스타를 팔던 푸드트럭. 동네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줄을 서서 한 접시씩 사 먹곤 했다.
푸콘에서 발견한 보석같은 디저트 가게 Huerto Azul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어야지 하며 가본 곳이지만 (밖에 그려져 있는 아이스크림 콘 그림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감)
온갖 잼들과 수제 초콜릿들이 한가득이었다
옴마야 이건 또 뭐에요
사탕들도 너무 귀여워
진정하고 아이스크림만 사서 나오는 길. Doble로 올려 주셔서 산책하는 내내 즐겁게 먹었다.
그리고 사실 호두 캬라멜도 사옴
츄릅 넘 마시써
굳이 호두 캬라멜을 사온 건 우리 호스텔 이름이 la nuez(호두)라 나도 모르게 뇌리에 박혀 있었나 보다...
*
한참 동안 밀린 사진들을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고, 일기도 정리하다 문득 해질녘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숙소 밖으로 뛰쳐나왔다.
푸콘의 호수는 마을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소위 일몰 스팟이었던 것...!
온종일 구름이 많은 하루였네
맞은편의 산맥이 일몰만큼이나 멋졌다. 멈춰서서 사진을 찍던 외국인 관광객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
화산 쪽에는 구름이 더 많이 껴 있었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빨리 호수로 가서 해 넘어가는 걸 봐야 했지만
저녁 즈음의 비스듬한 빛을 받아 오묘하게 색이 변해버린 꽃과 나무 장식 따위를 찍으며 (??) 시간을 보내다가
도착하니 이미 해는 없읍니다
하지만 살면서 처음 보는 멋진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산봉우리에 눈이 더 쌓인 것 같은데
내일이면 여길 떠나 푸에르토 몬트로 가고, 이제 또 며칠이 지나면 인터넷도 안 터지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4일이나 트래킹을 하겠지. 그러고 나면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가, 2주 가량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왠지 그 생각에 쓸쓸해져서 한참 동안 컴컴해진 호수를 보고 있었다.
센-치
돌아가는 길엔 Eltit에서 탄산수와 크래커를 샀다.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한 배고픔
호스텔 로비에서 와작와작 먹고 있자니, 내 방 옆침대를 쓰는 독일 할머니께서 와인을 한 병 들고 다가오셨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치 활동에 가담했던 부모님께서 2차 대전 종전 후 칠레로 망명을 왔고, 할머니는 인생의 반을 칠레에서, 나머지 반을 독일에서 보내셨다고 한다. (칠레에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나치스와 연관이 있는 가정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때 처음 알아서 꽤 놀랐다) 멕시코 께레따로에서 지낼 때 독일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께서는 덤덤히 오랫동안 풀어 놓으셨다. 침착하고 현명하신 어른과 대화를 나누는 건 늘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칠레에서 보낸 시간들 중 손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시간.
*
다음날 8시부터 푸에르토 몬트행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취한 상태로 잠들기는 싫어서 숙소 주위를 여러번 맴돌다 잠이 들었다
이제 칠레에서 보낼 날도 진짜 얼마 남지 않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