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1 : [Pucon] 이 평화를 잃고 싶지 않아
2015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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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서 푸콘까지
발파라이소를 떠나 산티아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쯤.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한답시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 졸던 와중, 안의 가게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밤 버스 시간이 다 되어 있었고, 결국 너전하게 생긴 또르따 샌드위치 하나를 위에 밀어 넣고는 푸콘행 밤버스에 탑승했다. 멕시코에서 여행 계획을 짤 때만 해도 밤버스 타는 게 두려웠는데 (강도나 짐 도둑 등등) 돈을 좀 더 써서 비싼 버스를 타면 그런 걱정은 확실히 덜어지는 것 같았다. 당장 내가 칠레에서 타고 다녔던 pullman 버스만 해도 밤새 내리고 싶지 않은 퀄리티였으니까. 호스텔 숙박비도 아끼고 남미에서의 기나긴 이동시간도 커버할 수 있고 하니 1등급 밤버스를 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네 ~ㅅ~
뭐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너무도 깊이 잠들어버려서, 풀만 버스 승무원이 나눠주는 간식박스를 챙기지 못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내 자리 옆의 콘센트가 고장났기 때문에 (아니 1등급 버스 왜 탔냐고) 폰 충전도 할 수 없었고. 일찍 떠 버린 칠레의 한여름 태양에 나도 같이 눈을 떠 황망해하고 있을 무렵, 테무코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테무코... 테무코....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네루다의 출생지이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곳이라고 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테무코는 그저 한적하고 작은 도시였다. 어쩐지 네루다의 시 한 편이 읽고 싶어져 깜빡이는 배터리와 흐릿한 버스 와이파이를 애써 붙잡고 구글링을 하던 와중, 스마트폰은 힘없이 꺼지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차해 있던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그리고 초록색 풀밭이 한동안 창밖으로 펼쳐졌다. 모래 먼지 날리는 아타카마 사막을 떠나온 뒤로는 심심찮게 봐 왔던 풍경이지만 왜 익숙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풀밭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하얗고 까만 젖소들과, 넓은 호수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제 어제부로 칠레 중북부 여행은 끝났고. 중남부로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였달까.
버스는 비야리카라는 작은 마을에 한번 더 정차한 뒤에야 나의 목적지인 푸콘으로 향했다.
비야리카와 푸콘은 (동명의) 비야리카 호수를 사이에 두고, 각각 양 끝에 위치한 도시이다. 푸콘의 남쪽에 있는 화산의 이름도 비야리카. 푸콘에 오는 사람들은 호수와 화산을 함께 끼고 있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을 즐기러 오는 것이다.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푸콘의 pullman 버스 터미널
온통 나무로 만들어진 버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콘센트를 찾아 헤매었다. 터미널 바깥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이 작은 동네에서 저걸 탔다가는 호구 잡히는 건 한 순간일 것 같았기 때문에.. 빠르게 충전을 하고 숙소 위치를 파악한 뒤 걸어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치만 모든 곳이 나 같은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어서 결국 화장실에 서서 충전했다는 슬픈 후문)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글맵을 켜고 숙소로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파란 화살표가 나를 이끄는 대로 약 20여분을 걸어간다. 산티아고에서 12시간이나 걸려 남쪽으로 내려온 덕분인지, 그곳처럼 찌는 듯한 더위는 없었지만. 나오라는 호스텔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던 어느 가족에게 길을 물어보자 번지수까지 일일히 확인해 가며 알려 주시는 덕에 김귤희 마음은 따뜻해졌구 *0* 덕분에 무사히 오늘의 숙소 Hostal La Nuez에 도착
구글맵이 알려준 위치와는 세 블록이나 차이가 났었는데,, 아마 비교적 새로 생긴 곳이라 (2015년도 기준) 위치가 잘못 찍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다음 도시였던 푸에르토 몬트에서도 구글맵이 숙소 위치를 이상한 곳에 찍어놔서 1시간 넘게 개고생을 했던 걸 떠올려 보면 칠레 남부에서 구글맵의 정확성은 크게 믿을만 한 수준이 못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암튼 Colo Colo라는 귀여운 이름의 길에 위치해 있던 내 숙소! 쓸데없는 고생을 하며 도착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깔끔하고 넓은 거실과 훌륭한 주방까지. 물론 그 주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곤 팔도비빔면을 끓여먹는 것 뿐이었지만ㅋㅋㅋㅋㅋㅋ 구석구석이 마치 심즈에 나오는 집마냥 멋진 인테리어로 가득 차 있었고. 무엇보다도 침대가 환상이었다. 호스텔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푹신하고 넓은 침대! 한번 누우면 절대 못 일어날 것 같았고 실제로 푸콘에 머무는 짧은 이틀 내내 나는 빈둥거리고 말았다...
암튼 빠르게 짐 풀고 비빔면 호록 먹은 다음에 동네 구경을 시작합니다
숙소 코앞에 대형마트가 있어 늘 오며가며 구경하곤 했다. Eltit이라는 이름의 이 마트는 칠레 남부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었다.
짜잔. 구글맵 때문에 캐리어 끌고 길바닥에서 헤매며 숙소까지 걸어오는 와중에도 김귤희는 행복했었는데, 그 이유는 푸콘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쳐다만 봐도 두근거리게 되는 비야리카 화산과 아기자기한 목조 건물들, 곳곳에 피어 있는 수국들까지. 푸콘의 탐스러운 수국들을 볼 때마다 여기에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년이고 마냥 눌러 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화산 쪽 날씨는 아주 불규칙하기 때문에 종종 구름이 낀다고 한다.
볼 때마다 wow...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여긴 언제 화산이 폭발해서 재로 뒤덮일지 모르는 그런 위험천만한 마을.
실제로 내가 다녀간 뒤 몇 달이 지나지 않은 2015년 3월에 비야리카 화산이 크게 폭발하여 3천여명이 긴급 대피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곳곳의 커여운 풍차들
이게 무슨 일이야
살면서 이렇게 가까이서 화산을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봐도 봐도 CG같고 멍해져서 이날은 하루 종일 화산만 쳐다봤던 것 같다 (물론 그 다음날도)
푸콘에서 사람들이 하고 가는 No.1 액티비티는 아마 비야리카 화산 트래킹일 것이다. 당시의 김귤희는 돈 없는 백팩커였기 때문에, 상당한 투어비를 내야 했던 (약 10만원 정도로 기억한다) 화산 트래킹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정상 남들 다 가는 바릴로체에는 못 가고, 나도 남반구의 화산과 호수는 보고 싶었기 때문에 한번 와 본 거였다고... 그리하여 트래킹 대신 오늘 밤에 출발하는 온천 투어를 예약했다. 동네 곳곳에 여행사가 있어 예약할 곳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저 휴양지스럽다가도, 또 어느 골목으로 문득 들어가면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한적한 동네. 높은 건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동네
푸에르토 몬트로 가는 버스표는 2015년 기준, JAC 회사에서만 살 수 있었다. 독점 노선이라 그런지 칠레 물가가 이 모양이라 그런지 버스표 가성비의 상태가....? ^_ㅠ 씁쓸한 마음으로 모레 아침에 떠나는 표를 샀다.
그리고 cafe organico라는 작고 귀여운 카페를 근처에서 발견해서 베리쥬스 한 잔과 엠빠냐다도 먹는 여-유
점원 언니가 활짝 웃는 얼굴로 맞아주셔서 기분이 좋아졌다. 푸콘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미 이곳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푸콘이라는 이름마저도 ~ㅅ~
심지어 맛도 있었다. 칠레 와서 그저 엠빠냐다 먹고 있는데 그 중 베스트는 단연 이 곳이었다
구글맵에 찾아보니 폐업했는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움. 하긴 푸콘 같은 곳에서 오래 영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 같다
다시 시작된 산책
봉우리에 살짝 걸쳐져 있던 구름은 아까의 서풍을 타고 사라졌는지, 말끔하게 모습을 전부 드러낸 비야리카 화산이 보였다. 아? 3시간 동안 오르막길만 주구장창 올라가야 한다는 화산 트래킹에 대한 도전정신이 생겨나는데?
그치만 60도 경사를 평지도 없이 올라가야 하니까 포기하자 (빠른 손절 + 스스로의 주제 파악)
예쁜 수국이나 봅시다
바닥에 녹아 있는 멍멍이도 보고
화산+온천 패키지 (55000원 페소면 당시 한화로 11만원 정도여서 매우 싼 가격이었네) 할인가를 봐도 쿨하게 지나쳐 보기
서양인 백팩커들에게 핫한(?) 식당인 샌드위치 우노도 발견
그렇게 여기저기 걸어다니다가, 달리 할 게 없어서 다시 카페에 들어왔다
남미 여행 하면서 이런 여유가 얼마만이야. 발파라이소에서는 왜 카페 하나 안 들르고 발에 땀 나게 돌아다니기만 했던 건지.. 아니면 그래서 지친 건지(???) 몰라도 이날은 카페에만 두 번이나 들렀네. 아무튼 이 곳은 푸콘의 자랑인 kuchenladen이라는 독일식 케이크 가게
워낙 유명해서 이미 알고 있는 가게이긴 했지만, 사실 바깥을 지나가다가 쇼윈도로 들여다보이는 조각케잌의 크기에 충격을 받아 홀린 듯 입성했다. 맛도 세상에 이런 맛이 ㅠㅠㅠㅠ 지구 반대편에는 이런 미-미 케이크가 있단 말이여? 달고 바삭하고 부드럽고 새콤하고 먹을 때마다 오두방정 떨며 먹게 되는 맛.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도 큰 케이크였지만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말았다
케이크와 에스프레소 조합은 살앙
케이크 종류가 꽤 많았는데 여럿이 와서 한 조각씩 먹어 주는 게 상도덕인데... 쩝...
칠레에 와서 어쩐지 동행 없이 혼자 다니고 있다 보니 돼지파티를 못 했던 게 못내 아쉽다.
더 주세요 /ㅅ/
다시 밖으로 나온다. 아아 저 바위산은 또 뭐야 칠레 이녀석 이렇게 멋진 자연을 꽁꽁 숨겨두고는
바로 옆에 있던 플리마켓도 구경. 예쁘고 비싼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또 수국
그리고 또 화산.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겁니까
이런 집에 살면서 매일 비야리카 화산을 올려다 볼 수 있다면 을매나 좋을지
Kuchenladen 가게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걸으면 보트 선착장이 나온다. 호수를 구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수면 위로는 이미 기울기 시작한 해가 비쳐, 호숫물은 온통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왼편엔 여전히 선명한 비야리카 화산
모래는 까만 색
이게 그림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에요
아마 돈 내고 보트를 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사진상으로는 늦은 오후 같지만 시간은 이미 오후 7시가 넘었을 때. 슬슬 온천투어 출발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호수에서 시간을 보내다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중에 카메라 설정 잘못 눌러서 아련한 필터 장착
저길 어떻게 올라가게 된다는 걸까 ;ㅅ; 죽기 전에 푸콘에 또 올 일이 있겠지 그땐 돈과 체력을 들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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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투어 시간이 다 되어서 여행사와 약속한 장소로 출발
비야리카 화산 덕에 인근에 온천이 많았는데 그 중 하나로 가게 되었다. 혼자 온 사람이 나밖에 없진 않겠지 ^_^ 싶었지만 나밖에 없었고... 한국인들은 푸콘에 안 오는 거였을까
봉고차 1인용 자리에 앉아 쓸쓸히 출발. 푸콘에서 1시간 정도 달려 온천에 도착하자 시간은 어느새 저녁 9시였다.
11시까지 각자 온천을 하고 약속한 장소로 모이기로 했다.
산 속에 여러 개의 노천탕이 있는 곳이었다
사진으로 보니 구려보이는데 온도도 제각각이고 탕마다 분위기도 제각각이어서 나름 좋았다
훌륭한 가족 커플 여행지구나 (쓸-쓸)
미리 안에 입고 온 수영복 차림으로, 제일 뜨끈한 탕을 찾아 몸을 담그었다. 이게 얼마만의 목욕인지 모르겠네. 4개월 전 멕시코에 왔을 때부터 탕에 들어가 본 기억이 없구나.... 가족 단위로 왔던 칠레 사람들과 잡담을 하며 해가 지고 하늘이 깜깜해지기만을 기다렸다. 한여름의 칠레, 그것도 산티아고보다 훨씬 남쪽이었던 푸콘은 밤 열시가 되어도 마냥 환했다. 그나마 이곳은 깊은 산 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샌가 하나 둘 별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유니와 라세레네에서 봤던 것처럼 쏟아질 듯한 별은 아니었지만, 오리온자리의 어깨는 여전히 선명한 빨간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바로 옆의 시리우스도 이름값을 하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라세레나에서 천문대 투어 하길 잘 했지 😂 무엇보다도 이렇게 별을 보며 온천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도 행복했다.
밤의 온천탕. 주변의 조명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다른 별들도,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가며 캄캄한 길을 걷다 보니 눈에 들어왔다.
푸콘 시내에 도착하니 이미 새벽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 거의 호스텔까지 달려가다시피 해서 침대로 파고들었다. 온천을 마친 노곤노곤한 몸으로 침대에 눕자니 천국이 따로 없는 밤이었네...푸콘에서의 평화로운 하루는 이렇게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