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 [Sucre] 수크레 두 번째 날과 반가운 얼굴들
2014년 12월 29일
빼도박도 못하게 2014년의 연말이었다. 일정이랄 것이 없는 수크레에서의 두번째 날이 밝았다.
이런 날은 보통 일찍 일어나도 아 뭘 하지....잘까.....그래 더 자자.......하며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나는 것이 미덕이고. 오늘도 어김없이 그렇게 눈을 뜨니 이미 호텔에서 주는 아침 시간은 지나있었다. 아 볼리비아에서 하룻밤에 3만 5천원씩이나 내면서 아침을 못 챙겨 먹다니. 아무리 여행하면서 막 살고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는 살지 말자( •́ .̫ •̀ )그렇게 아쉬움에 가득 찬 상태로 전날 밤에 비몽사몽간에 알아봤던 값싼 호스텔로 숙소를 옮기기 위해 허겁지겁 짐을 싸 놓고, 늦은 아침부터 맛집 헌팅을 나섰다. 나서는 발걸음이 왠지 가벼웠던 걸 보니 아침을 놓친 건 내 무의식이 수행한 신의 한 수였나;;
암튼 이날 아침은 볼리비아 살테냐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던, 2014년 당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하던 El patio라는 살테냐집에서 먹기로 한다
(살테냐=만두 비스무리한 음식. 볼리비아의 엠빠냐다랄까 물론 내용물이나 모양이나 조리법 같은 것이 세세한 부분에서 좀 다르다)
백색 도시의 눈처럼 새하얀 성당
그리고 오늘도 트립어드바이저에 배신을 당하는 슬픈 나. 트립어드바이저에 나와 있는 위치만 믿고는 한 손에 스마트폰을 꼬옥 쥐고,, 갔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 진짜 배고픈데 화나게 하지 말아라
혼란에 빠져 동서남북을 둘러보다가 무작정 언덕도 올라가 보고. 어제와는 또 다른 수크레의 거리 모습에 감탄도 해 보고
볼리비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는 수크레. 헌법상 수도의 위엄은 아무 데서나 나오는 게 아니람니다
월요일 햇살 아래 활기차게 빛나는 빨간 지붕들이 좋아서 한동안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살테냐 집은 어딨죠
쓸쓸히 언덕을 내려가는 중
다시 구글맵에 검색해서 나온 위치로 찾아가고 있는데, 그만 가는 길에 보고야 말았다. 어떤 작은 구멍가게에서 살테냐를 파시는 아주머니를....
제가 진짜 웬만하면 참으려 했는데요 아침도 못 먹고 너무 화가 나서 (??)
인생 첫 살테냐의 소감은....맛있었다....안에 알차게 들어 있던 고기와 감자, 양파, 그리고 조심하지 않으면 옆으로 줄줄 다 흘러버리는 뜨끈한 국물까지. 이런 음식을 발명한 사람들 복 받으세요 ㅠㅠ 자 그건 그렇고 El Patio까지 가겠다고 나와 놓고서는 길거리에서 아무 살테냐나 사먹은 내 자제력은 어쩌지.....하며 두 블럭 정도를 더 걸어 내려와 오른쪽 코너로 돌았더니
바로 El Patio가 나왔다. 뭐야 숙소 바로 옆이잖아 아침부터 뭔 짓을 한거여
지금은 고쳐져 있길 바란다 트립 어드바이저...(부들)
이름에 걸맞게 가게 안쪽에는 널찍하고 햇살이 잘 드는 patio가 있었다
다들 아침 드시러 오셨는지요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창구에 서서 주문을 하고, 주문서를 주방 쪽에 갖다 주면 곧 작고 소듕한 살테냐가 종이에 둘러싸여 나온다
아침부터 사람이 워낙 몰려서 12시가 되기도 전에 문을 닫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관광객들보다도 현지인들이 더욱 아끼던 맛집. 고기 살테냐 하나를 포장해서 즐겁게 밖으로 나왔다.
왼손에 가득 쥔 살테냐를 보니 또 행복이라는 것이 폭발하네요 참으로 듬직한 중량감이다
그렇게 신나게 호텔로 돌아가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데. 저 멀리 굉장히 익숙한 헤어스타일과 이마 그리고 선글라스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니 손을 흔든다. 어어어 이게 누구야 아레키파에서 만났던 Y오빠와 H언니였던 것이다 !!! 내가 어제 얼마나 외로웠는지 어떻게 알고ㅠㅠㅠㅠㅠㅠ이 사람들ㅠㅠㅠㅠㅠ고마워...나타나 줘서 고마워...
옆에 있던 언니오빠의 동행분과도 인사를 나눴고ㅡ 12시에 다 같이 광장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한다.
무튼 호텔로 돌아가서 짐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졌고. 일단 방금 사 온 살테냐부터 먹자..(뽀시락)
맛있긴 한데 살테냐 자체가 좀 단 음식이어서 그런지 두 개째 먹으니까 속이 니글거렸다
*
다 먹고 나서 바로 침대에 눕는 건 역시 싸이언스죠. 누워서 우리 호텔 천장을 멍하니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갑작스럽게 온 몸이 무겁고, 이 더운 날에 새 숙소까지 끌고 가야 할 캐리어도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고(?)....응....? 그래서 그냥 로비로 총총 내려가 하루 더 묵겠다고 숙박을 연장해버렸다. 그래 봤자 삼만 오천원이었지만 이 때는 만원에도 덜덜 떨었던 가난한 여행자였죠 네에...
그렇게 한순간에 3만 5천원을 더 써버리고, 약속했던 광장으로 나가 언니오빠를 만났다. 언니의 옆에서 누가 또 반갑게 인사를 해서 띠용? 했는데 코파카바나에서 방을 같이 쓰며 동고동락하였던 동생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만남의 광장 수크레 아닌가요 ;ㅅ; 그렇게 우리는 총 5명이 되어 프랑스 코스요리를 함께 먹으러 갔다.
수크레 사는 유럽인들과 여행 온 한국인들(....)은 전부 아는 집인 것 같았던 La Taverne
식전빵부터
쥬스까지 등장. 싱거웠다. 쥬스는 쥬스 전문점에서 먹자
아보카도가 들어간 샐러드는 사랑이에욥
단호박죽 비슷한 (...) 수프에 치즈까지 들어갔는데 맛있었다
레드와인 스테이크. 소스가 너무 마싰어
후식은 바나나 크레페
가성비는 무척 좋았지만 맛은 그저 그랬던, 그치만 수크레에 장기 체류를 했다면 일주일에 두 번씩 왔을 것 같은 식당이었다 (이게 칭찬이야 욕이야)
다 먹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저녁 먹을 장을 보는 동안 나는 우유니로 가는 버스를 끊기 위해 여행사로 향했다. 웃는 얼굴로 비싼 버스 표값을 부르는 여행사 직원이 나를 반겼고.... 만사가 귀찮았는지 그냥 Ok OK 알았으니까 빨리 해줘! 를 외쳤다. 그렇게 가까스로 내일, 12월 30일에 우유니로 떠나는 버스표를 획득. 31일을 넘겨 버리면 또 연초라고 버스가 없겠지 싶어서,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서둘러 수크레를 뜨기로 했다. 한 달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동네였지만.
수크레는 해발고도가 라파즈나 코파카바나, 우유니를 비롯한 다른 볼리비아 지역들보다 낮은 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낮에는 해가 매우 따가웠다. 아 맞아 나 지금 남반구에 있고. 여기는 여름이지. 라는 사실을 실로 오랜만에 깨달았다. 라파즈에서 침낭에 들어가서도 덜덜 떨며 잤던 게 엊그제같구만..
버스표도 샀겠다 어제 못 했던 시장 구경이나 해볼까
그리고 오늘도 과일가게 앞에서는 호갱이 됨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 보라며 아낌없이 떼어 주시는 아주머니의 현란한 고객 다루기 스킬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왜냐면 진짜 다 맛있그든요..........0.5킬로씩 팍팍 주세요를 외치고 있는 나를 발견.....
체리도 아주아주 맛있었으나. 체리의 고장(?) 칠레 산티아고를 위해 아껴두었다.
그렇게 두 손 가득 과일을 들고 호텔에 돌아와 버렸다... 이걸 언제 다 먹지라는 걱정도 잠시. 한 조각씩 애플망고를 뜯어먹기 시작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씨앗만 남는 거 너무한 거 아니냐
남미에서 보이기만 하면 사먹게 되었던 청포도. 망고도 자두도 다 달지만 나의 베스트는 청포도인 것으로
20볼 맞춘다고 1볼에 넘겨주신 애플망고. 호텔에 칼이 없는데요....하니까 No Ploblema! 하며 칼로 슥슥 칼집을 내 주셨다. 망고 개미지옥에 어서와...
그렇게 순전히 쳐먹기만 하며 1시간을 보냈고. 일행들을 만나러 그들이 묵고 있던 호스텔로 향했다. 역시나 어제처럼 5시가 되자마자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
가는 길에 H오빠가 크록스 사는 걸 구경했는데 이분 무려 크록스 핀 가격을 깎던 대단한 사람임
저녁은 쌀밥과 짜파구리와 라면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한인 분께 받아 왔다는 김치까지. 이런 걸 막 얻어 먹고 있어도 되는 건가.... 천사 같은 언니오빠동생들 덕분에 이게 얼마만인지 모를 한식으로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 프링글스에 아포가토까지 만들어 먹고는 토토가를 함께 보려 했으나 와이파이가 느려 인터넷 창이 열리지 않았다. 그 상황마저 너무 즐거워서 행복했다
다 놀고 호텔로 돌아가려니 동생 중 하나가 심지어 안 입는 옷까지 수여해 주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행을 길게 할수록 어째 남이 입던 거 입고 먹던 거 먹고 참 희한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우유니에서는 오랜만에 새옷을 입게 되었다...여전히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를 뚫고 혼자 호텔로 돌아올 때도, 전날 밤과는 달리 외롭지 않았다. 역시 동행은 좋은 것이고. 일단 사람들로 우글우글할 연말의 우유니에 나 혼자 가지는 않게 되었고 그래서 더 행복했다. 좋은 기억만 남겨준 수크레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