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gabond/2014 Peru

D+15 : [Huaraz] 고난의 69호수

만만다린 2019. 4. 17. 22:38



2014년 12월 17일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한 시간 단위로 잠을 깼다.


오늘은 와라즈에 온 이유인 69호수 트래킹을 가는 날이었다. 5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 대충 씻고 화장까지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배낭에 짐을 넣었다. 이렇게 되는 대로 쑤셔넣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약속한 시간에 아킬포 호스텔 사무실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틈은 없었다. 준비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가 보니 (69호수 트래킹은 한국 사람들 밭이라고 분명 들었건만) 어쩐지 서양 사람들 밖에 없었고....유럽 로봇들의 트래킹 속도는 이미 여기 저기서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벽 댓바람부터 걱정이 앞섰다. 얘네 지금은 나랑 이렇게 웃고 떠들어도 나중에 산 가면 날 버리고 먼저 올라가뿌겠지 ㅠㅠㅠㅠㅠㅠㅠ


안 그래도 나는 이 일정에 대해,, 참말로 많은 고민과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기타등등을 가지고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몸 부실하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질 않는데다가, 학교 뒷산이라는 관악산 한 번 안 가본 인간이 안데스 산맥을 올라간다니 나 제정신이니???????? 하면서도 오직 이 투어만을 위해 와라즈에 올 계획을 차곡차곡 세웠던 것이다. 그 계획에는 물론 '좀 올라가다가 힘들면 그냥 내려가 버릴 것이다' 라는, 내용만 보면 플랜B이지만 스스로는 A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위 '중도포기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올라가다가 고산병 증상이 심해져 포기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내가 그들보다 체력이 좋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흐흑.... 어쨌든 새벽 6시가 되니 칼같이 버스가 아킬포 앞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호스텔 투숙객들이 띄엄띄엄 앞자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별 생각 없이 맨 뒤로 가서 앉았다.



가이드 아저씨의 간단한 설명 후, 버스는 우아스카란 국립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융가이라는 마을로 출발했다. 과속방지턱이 나올 때마다 나를 포함한 맨 뒷좌석의 여성 5명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튀어올랐다. 이 어메이징한 도로 포장 상태는 무엇이죠...?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덕분에, 10분 내로 잠이 들어 융가이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섬거리는 소리에 버스 밖으로 무작정 따라 나오니 작은 식당이 있었다. 이제 여기서부터 69호수까지는 슈퍼도 없고, 화장실도 없으니 미리 다 해결해! 라는 가이드 아저씨 헤수스의 말에.. 우선 독일에서 왔다는 여자아이들의 테이블에 껴서 빵쪼가리와 과일 주스를 주워먹기 시작한다.



우리가 내린 간이 휴게소(?) 근처의 풍경.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 독일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남미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독일에는 졸업과 동시에 이런 유예 기간이 있는 걸까? 1년 정도 기간을 잡고 여행 겸 봉사활동으로 왔다고 하는데 세상 이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트래킹을 하면서 먹을 빵까지 한꺼번에 주문하는 바람에 우리 테이블에만 빵이 수북하게 쌓여서 사람들이 전부 웃었던 기억이 난다.




식당을 떠나기 싫게 만들었던 아가 멍멍이들


그리고는 약 40분간의 비포장도로.....맨 뒷자리에서 경험하는 남미 첫 비포장도로는 잊을 수가 없을 수준이었다. 멀미약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내가 아침에 대충 짐 쌀때부터 알아봤지 아오 아오오오오...다행히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차가 정차했다. 국립공원 입구의 얀카누코 호수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10분을 주는 것이었다.




Llanganuco 호수



굳이 Laguna 69까지 못 올라가도....여기 호수가 이뻤으니 상심하지 말자...하며 나는 미리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ㅋㅋㅋㅋㅋㅋ)



빙하가 녹은 호수를 실제로 본 건 이 때가 살면서 처음이었을 거다


아 이래서 말도 안 되는 물 색깔이라고 하는 거구나. 카메라에 담긴 사진이 자꾸만 합성 사진 혹은 깨진 파일 사진; 처럼 보여서, 버스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멍하니 이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다들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신나서 호수를 구경한다



 내려가 보는 용자 두 분


*

그리고 얼마간의 구불구불 산길을 더 달려 드디어 오늘의 트래킹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트래킹 하기도 전에 차멀미로 기력을 대폭 소진해 버린 슬픈 상황. 설마 이 중에 나만 그런 건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 나만 그런 것 같았다^*^ 아오 이 저질체력이 여긴 또 왜 오겠다고 해서. 아무튼 외국분들은 트래킹 하기 전에 무얼 하나 보니, 각자 가져온 선크림 바르고 등산 스틱 꺼내고 바지 걷고(왜죠) 전투태세로 돌입하고 계시는 분들이 태반이었다. 등산복, 등산바지에 트래킹화까지 단단히 무장하고 온 이들 틈새에 레깅스와 니트와 런닝화를 대충 걸치고 입고 신은 내가 있었다. 아 나 되게 생각 없는 애같아 보이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일 일단 등산바지부터 하나 사야겠다 생각하며 드디어 트래킹 시작.



베이스 캠프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골짜기. 이제 저 평지를 지나 산 두개를 넘어야 69 호수를 만날 수 있다


우선 가파른 돌계단을 좀 내려갔다. 나중에 돌아올 때 여길 다시 오르는 게 참 지랄맞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예지력 컴 트루) 

다 내려오니 드디어! 와라즈에 오기 전 블로그 사진으로 많이 보던 냇가와 초원과 소떼들이 있었다. 끼약!!!!!!! 매우 신이 났지만 겨우 진정하고 (고산에서 팔딱팔딱거리면 매우 위험하다) 대신 사뿐한 발놀림으로 현재의 기쁜 마음을 표출하며 천처어언히 걸었다. 



이 뽀얀 물좀 보세요 신이 안 날 리가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Laguna 69

저 이름이 붙은 건 다만 69번째 호수여서 그렇다고 한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곳이었네




낯선 자연 풍경에 그림으로만 보던 얼룩무늬의 소떼들까지

이 소들은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있다. 와라즈 시내에 사는 사람이라는데 3개월에 한 번 정도씩 와서 잘들 있나 체크만 하고 간다고 한다. 그냥 막 풀어 놓아도 알아서 잔디 뜯어먹고 잘 클테니까 얼매나 좋을까





어느 아조씨의 교감 시도...는 소를 화나게 만들어 결국 실패로 끝나심


암튼 해맑은 상태로 트래킹 시작. 같이 차를 타고 온 유럽 로봇들이 하나 둘 나를 앞질러 갔다. '이따 올라가서 봐! / 그랭!' 하며 짧고 쿨한 대화들을 연거푸 하며 나는 나으 마이웨이를 간다.... 소문대로 길에는 소똥이 즐비했다. 풀밭에는 없고 어쩐지 사람들 다니는 트래킹 패쓰에만 이렇게 퍼질러 놓은 건. 아무래도 소들이 여기를 화장실로 생각하고 있는 거여서인가.... 하긴 풀밭은 걔네 밥 먹는 곳이잖아....


애써 피하며 앞으로 걷고 있자니 슬슬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롤케잌을 8조각이나 산건 역시 너무했나. 초코우유도 넣은 건 과욕이었나. 배낭의 무게는 내 삶의 무게라고 어디서 들었는데, 나새끠의 삶은 부질없는 식욕으로 그만 살찌어 버렸구나....시댕... 하지만 아직 걸은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지칠 수 없었다. 악착같이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내가 아주 느리게 걷는 편이 아니었는지, 초반까지만 해도 뒤에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호옹 이 정도면 나 나름 중위권으로 도착할 것 같은데? 힘내야지! 하고 결심하자마자 갑자기 비가 우수수수수수 쏟아진다. 나이키 경량패딩은 비를 맞으면 무거워지더라. 고난이 시작되고 있었다.


*

(앞으로는 욕 주의)

비가 오면 주변 사진이고 말고 없다. 그냥 조용히 카메라는 가방에 넣고(무게가 10 증가합니다)  발밑이 미끄럽나 안 미끄럽나 매의 눈으로 보면서 그저 닥치고 조심스레 걸을 뿐이다. 완만한 경사를 오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나왔다. 위에서부터 빙하가 녹아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매우 아름답고 좋기는 커녕 존나게 미끄러웠다.. 와장창


런닝화는 이미 물에 푹 빠진 아쿠아슈즈의 꼬락서니였고 게다가 비가 오니 소똥과 진흙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 더 슬픈 것은....이미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소똥 위에 찍혀 있었던 것이다.......아아....그렇다. 이 트래킹에서 소똥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어디 한번 밟아봐라! 하고 싼 것 마냥 길 한복판에 있는데 이걸 무슨 수로 비켜가리. 나는 진짜 안 밟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아마 한두번은..그랬겠지 나도...^_ㅠ 뭐 밟았다고 해도 곧바로 또 시냇물에 발이 빠지며 퀵샤워를 했을테니 실로 밸런스가 맞는 환상의 트래킹이구나



그렇게 한참을 호흡곤란 상태로 올라가다 보니 비는 잠시 그쳤다.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 본다..

날이 흐리고 안개가 자욱했음에도 빛이 나던 경치. 안데스를 우기에 왔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겠지 뭐




. 오히려 더 신비한 분위기가 나서 좋았던 것 같다. 이 풍경의 진정한 일부가 되기 위해 벼랑에 걸터앉아 되도 않는 실력으로 오카리나를 불고 싶어지는 기분 (???)

이때 중간중간 셀카도 많이 찍었는데 정말 봐줄 수 없는 몰골이어서 티스토리에는 못 올리겠다..



어쨌든 비는 (잠시) 그쳤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내가 꽤 많이 올라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새 시간은 9시에 베이스 캠프를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고. 69호수로 가기 위한 첫 번째 산을 열심히 넘는 중이었다.

어째서인지 나만 보면 소들이 울고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고 해서 사람들이 신기해하였다. 나한테 소똥 냄새라도 나는거니 그런거였니........? 평지가 끝난 지 한참 되었고, 이곳은 경사가 있는 산등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풀 뜯는 소들이 보이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도전정신이 넘치는 소들이로구나.. 가끔은 길을 막고 서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와 소는 서로를 무서워하며 주춤주춤 길을 비켰다


이 국립공원의 시내, 폭포, 그리고 호수들은 전부 위의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빙하를 보는 투어도 있었는데 그래요 저는 이날 등산으로 뻗어버려서 가지 못했읍니다



무자비한 돌길을 계속 오르는 중. 음?? 이게 길이라고?? 진짜로??? 싶은 적도 많았지만 의심을 거두고 양팔과 양다리를 모두 쓰며 기어올라가본다..


*

쉴새없는 오르막길에 짜증이 날 때마다 나지막히 한국 욕을 내뱉으면 엄청난 힘이 났다. 시발 내가 이대로 뒤질 순 없고 69호수에서 죽어야지 시발!!!!! 그래 69호수에서 죽자!!!! 하며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걸 알아듣는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생각보다는' 트래킹 초반이 육체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해발 3500m 즈음에 있는데 고산병 증세도 하나 없고.? 나 진짜 약발 잘 받는구나. 다만 숨이 좀 찼는데, 이게 평소 운동량이 불쌍할 정도로 저조하여 그런 건지 아니면 고산이라 그런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자인 것 같다며 씁쓸해 함....근육 하나 없는 허벅지와 엉덩이도 슬슬 당겨왔다. 그래두 이렇게 생각보다는 안 힘든 걸 보니 나 의외로 등산체질일지도 모르겠는데? 집가서 엄마한테 자랑해야지 ^*^ 후후후 ^*^ 한국 가서 관악산 북한산 치악산 한라산 차례차례 다 올라보실까? 하며 등산꿈나무는 오늘도 헛된 꿈을 꿉니다..



오 뭔가 보일 듯 말듯



보일 듯 말듯 22


그렇게 30여분을 더 걷고, 이제 언덕을 넘기 직전이 되자 이내 또 숨이 턱까지 찬다. 가방 안의 초코우유가 다섯 보에 한 번씩 생각나는 매직. 그래도 일단 저기까지만 가서 너머에 뭐가 있나 보자! 하며 나를 약 50번 정도 조련한 결과, 드디어 첫번째 산 정상의 작은 호수에 도착하였다. 



69처럼 빙하 녹은 물 색은 아니었지만 나름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잠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허비하얐다




날씨가 맑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ㅁ/ 쉬어가기 딱 좋은 호수였지만 한번 앉으면 최소 10분은 퍼져 있을 것 같아서. 꾹꾹 참고 셔터만 몇 번 누르고 계속 걸었다.


*
호수를 지나니 너어어어얿은 평지가 나왔다. 비는 야속하게도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고 내 체력은 슬슬 방전되어 가고 있었지만 69호수까지 가려면 방금 넘은 것보다 더 가파른 두번째 산을 넘어야 했다. 시발 ㅠㅠ 일단 평지를 가로질러 열심히 걸었다. 내 뒤에 아직 8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심지어 보이지도 않아!!!!!! 더 빨리 열심히 걸어서 다른 놈들도 제쳐야지!!!! 훗훗후 라는 생각이 내게 그릇된 힘을 주었다. 망할 경쟁 심리.....그러나 이 평지는 오르막길만큼이나 힘들었다. 비가 와서 거의 늪지로 변한 데다가 곳곳에 폭이 넓은 시냇가가 있었기에 다리가 짧아 슬픈 나란 짐생은 번번히 레깅스를 무릎까지 적시곤 했던 것이다.



첫번째 산을 넘느라 고도가 더 높아져서 그런지 신기한 식물들이 많았다.


어쨌든 축축해진 레깅스와 나이키 러닝화와 함께, 마침내 두 번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와 ㅅㅂ 이게 등산이라는 거군요. 아까 내가 했던 건 산책이었나 보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경사의 돌길이 약 30분 가량 이어졌다. 69호수 트래킹 하시는 저질체력 분들은 두 번째 산을 조심하세요....

이제 해발고도는 대략 4,400m였고 진짜 확실히 고산이라 숨이 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턱쯤 올라와서 결국 바위에 기대어 앉았다. 호수에 가기 전까진 어디에도 퍼질러 앉지 않으려 했는ㄷㅔ....하고 생각했지만 몸은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 지퍼를 열고 초코우유를 꺼내고 있었음ㅋㅋㅋㅋㅋ 꿀맛이었다. 그 와중에 위에서 뭐라뭐라 말소리가 들려 올려다 보니, 어느새 두 명의 유럽 로봇이 69호수를 찍고 하산하는 중이었다. 나 얼마나 더 가얗ㅎㅐ...라고 물으니 스페인에서 왔다는 스윗가이가 15분만 더 힘내(찡긋)라고 상냥히 알려주는 것에 힘이 나서 다시 몸을 일으켜 본다. 처음 본 사람들한테 동료애 쩔게 느끼게 되는 좋은 트래킹이네....



그 와중에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69호수에도 안개가 잔뜩 껴서 거의 못보는게 아닌가 조바심이 들었다.

다리에 모터를 단 듯 걸었고 마지막에는 거의 네 발로 기어서....





드디어!!! 3시간 반의 오르막길 끝에 69호수에 도착했다


오ㅠㅠㅅ뷰ㅠㅠ왔다 왔어 I MADE IT!!!!!!!!하고 소리치니 이미 와서 앉아 있던 사람들도 YAYYYYYY!!!! 하며 환호한다. 그렇게 호수를 떠들썩하게 맞이하였다. 여전히 비는 억수처럼 퍼붓고 있었고 호수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이런 거센 비를 맨몸으로 (with 우비) 맞으며 세시간 반을 걸어왔다고....? 그 사실이 충격이어서였는지, 호수가 너무 멋져서인지, 그냥 추워서인지(...) 손이 달달달 떨렸지만. 일단 배가 고프니 롤케잌을 꺼내고 호숫가에 주저앉아 처량히 먹기 시작했다. 가이드 아저씨가 코카차를 주셨다. 이 알 수 없는 조합의 점심식사를 먹으며 호수를 멍하니 봤다.



디오스 미오...제가 정말 여기 와써요...



초라한 나의 점심식사




그렇게 30여분 주저앉아 있었을까 다행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호수를 둘러싼 바위 절벽들이 점점 선명히 보이기 시작




대자연 앞의 커여운 나

ㅋㅋㅋㅋㅋㅋ어디 보여주면 개그용 사진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뿌듯한 순간이라구욧..ㅠㅠ



무튼 희뿌연 공기와 빗줄기 속에서도 이 신기한 물색깔은 그대로였다. 날이 맑았으면 더 파랬겠지만 지금은 우기니까....하고 또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너가 우기에 와 놓고 누굴 탓하고 그러면 안된다...



사람들이 점프샷을 찍어주었지만 기력이 0이라 높이 뛰지도 못했다




마지막 파노라마샷을 찍고 이제는 호수와 작별한다. 어느덧 한시 반이 되어서 모두들 하산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름 중위권으로 도착한 덕분에 50분이나 호수를 구경했다는 사실에 뿌듯.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는데 야 내가 이걸 어떻게 올라왔지 미쳤네 싶어 2차로 뿌듯......


하산을 앞두고 비는 계속 점점 더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내려오는데 아까는 보이지 않던 다른 호수도 저멀리 보였다. 와아아. 아까 나 올라가고 있을 때 내려가던 스페인 남자애들 두명은 왠지 저기도 다녀올 수 있었을 것만 같은데.



안개 때문에 가려졌지만 저 너머에는 빙산도 있었다


*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통이었고 사진 찍은 건 1도 없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들고 무섭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맞져...? 가이드 아저씨가 없었다면 나는 이 산에서 조난당했을 것. 정신을 놓고 가라는 데로 가고 밟으라는 데만 밟으니 어떻게 잘 내려오긴 했지만, 점점 더 내리는 빗물로 온통 미끄러워진 길을 걷고 있자니 오만 데 기도를 하며 내려오게 되더라 하아. 제일 마지막에 도착했는데 버스 사람들이 박수 쳐줬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고마워...;ㅅ;


간신히 와라즈 시내로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 6시 반


12시간 가까이 비에 쫄딱 젖어있었다 보니 온몸이 덜덜 떨렸다. 샤워를 하고, 페루에 와서 처음이었던 빨래도 하고. 침대에 누워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또 달달 떨다가, 사무실로 가서 내일 할 예정이었던 빙하 투어를 조용히 취소하고 왔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피곤한 것도 피곤한 거지만 나 내일 신을 신발이 없어...오늘 다 버려서....... 그냥 시장에서 맛난 거 먹고 카페에서 밀린 사진이나 정리하고. 일기 쓰고 책이나 보다가 밤버스를 타고 리마로 돌아가서, 쿠스코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당분간은 또 고산병 약을 달고 살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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